※ 시점은 치기리 무인과 디스클로져의 사이인 거 같습니다.
※본편 스포일러가 조금 섞여있습니다.
※캐릭터 설정이나 성격이 좀 많이 무너집니다
※의식의 흐름을 주의하세요....ㅠㅠ
'매일같이'
'이거 곤란한데...'
다들 왁자지껄한 점심시간.
평소에도 사람 발길이 잘 가지 않는 곳이다.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자료실 반대쪽에서 히끅거리는 소리가 새어나왔다.
또 다시 본능적으로 안쪽 문에 기대어 숨을 죽였다. 오늘도 입이 바싹바싹 말랐다.
'또 하나의 비밀'을 떠안게 된 건 지난 몇 주 전 부터 ― 학원제 기간이 다가 오면서 부터였다. 어디 학교 학생회든지간에 이 기간에는 일거리가 산떠미같이 쌓인다. 회계인 나에게도 예외없이 장부 처리할 것이 기하급수적으로 느는 것이 인지상정. 게다가 이게 보통 투자하는 업무시간으로는 감내할만한 양이 아니다. 최근에는 그 녀석과 사가미, 에자시를 독촉하는 매일매일이였다. 다른 학생들을 들들 볶아가며 영수증을 정리해도 일거리는 도저히 줄어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디. 결국에는 잔업이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였다. 정말, 이 놈의 방정맞은 잘난 척! 평소처럼 마구 잔소리로 애들을 몰아세우고 있을 때 사가미가 살짝 걸어 둔 도발 ― 그럼 만능인 치쨩은 버얼써 학생회 일들을 다 끝냈다는 이야기인거야? 그거야 당연하지!
반사적으로 안경을 올리며 내뱉은 대답. 아, 저질러 버렸다. 결국은 점심시간에 이 한적한 자료실 구석 쪽방에서 남아있는 온갖 잡무에 고통받고 있었다. 되지도 않는 잡무를 왜 맡아서 이 고생인지, 다 하지도 못한 서류들을 가지고 왜 거짓말을 했는지. 욕과 함께 몇 마디 말들을 주워삼켰다. 그러던 도중이였다.
누군가가 걸어둔 자물쇠를 풀고 인기척도 없이 자료실로 들어왔다.
스페어 키는 내가 복제해 둔 것 빼고는 회장만이 가지고 있을텐데... 그렇다면 그녀겠거니. 대충 머릿속에서 상황파악을 끝내고 다시 볼펜을 잡았다. 그 순간 어제 그렇게 잰척 하면서 뒤에서 뻘뻘 일을 하는 내 모습이 괜히 머쓱해졌다. 창피해졌다. 평소에 착하고 배려심 많은 그녀라면 지금의 내 상황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지만 여튼간에 절대 들키면 안 된다. 최대한 내가 여기 있었다는 인기척을 지워야 한다. 어둑한 자료실에 그녀의 그림자가 가까워지자 손동작이 멎었다. 온갖 생각이 들었다가 사라졌다. 마치 취한 듯 나불나불, 되지도 않는 의식의 흐름이 중얼거리듯 떠다닌다. 대체 뭐 때문에 이 녀석이 이 시간에 여기까지 와서! 들켰을 때에는 대체 어떻게 모면해야하지, 아 그 불편한 침묵.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어색해. 끔찍해. 아니지. 잠깐만. 안 돼, 이렇게 정신없이 머리를 굴리다가 들킬지도 몰라. 미처 놓쳤던 진실이. 그녀의 '비밀'이 가진 최대의 무기가 뇌리를 스치자 가까스로 의식의 끈을 붙잡았다. 속마음이 들리지 않도록 마음을 비워야해. 느리고 낮은 심호흡을 쉬었다. 그녀가 이 곳을 나갈 때까지 상황을 적당히 넘겨야한다. 여튼간에 당장 내일부터는 다른 곳으로 옮겨야하나... 이거 정말 어떻게 해야하는 거야.
찰나에 귀에 얇상하고 가느다란 소리가 겹쳐져 왔다. 꾹 참은 단말마의, 끊기는 숨소리. 희미하지만 분명 그건 우는 소리, 일 것이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 그 소리는 이따금 점심시간을 기점으로 찾아왔다. 그녀가 머무는 내내 그치지 않는. 한껏 죽였음에도 떨리는 숨소리가, 낮고 조용하지만 처연한 눈물자국들을 남기면서
처음에는 이 난감하고 무안한 상황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구석 멀리로 도망쳤다. 머리를 비우며 나를 눈치채지 못하게 안간힘을 썼다. 다가갔다간 끝장이다! 하며 연필도 굴리고, 안경도 고쳐쓰며 없는 딴청도 부렸다. 하지만 그녀가 아슬아슬하게 자료실을 떠나갈 즈음. 이따금 방울방울 얼룩진 책상 위나 식어버린 온기, , 가끔 터져나오는 애처로운 단말마의 신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수렁에 빠지듯 점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그녀의 흔적을 쫓아서 한 발자국, 두 발자국 다가갔다. 비밀기지를 자료실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겠다는 마음은 이미 날아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바로 고개를 돌리면 그녀가 보이는 곳까지. 그저 웅크려 주저 앉아 멍하니 그 울음소리를 들었다. 단지 그 뿐이였다. 곁으로 다가가 위로해주고 싶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어깨를 두드리며 괜찮다고 한 마디를 건내고 싶다. 그럴 자격이 있나? 애초에 부끄럽다 숨은 건 너였고, 도망가려고 했던 건 너야. 진실이 밝혀졌을 때의 어색한 침묵이 싫으면서 계속 여기 있는 이유는 뭐냐? 치기리 레이이치. ― 연하게 내려앉은 그녀의 그림자에 자료실의 단말마가 울부짖었다. 과거의 땀냄새와 그 날의 모습이 오버랩되면서 스쳐지나갔다. 숨이 막혔다. 눈을 질끈 감자 귓가에서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들린다. 결국 여기까지 그녀를 절박하게 몰아 세운 건 너가 아니라고. 참지 못 하고 이렇게 남몰래 우는 그녀는 누가 만들었느냐고. 누구에게도 말 못하게 철처히 자기를 감추고 숨을 몰아쉬어야 사는 그녀를 누가, 과연 누가.
부정할 생각인거냐? 이용할 만큼 이용한 건 너, 비겁한 건 너잖아.
그러니 또 하나의 비밀은 고통의 연쇄속에서. 찢겨가는 기묘한 것들을 위해 바쳐야 하지 않겠느냐.